범용기

[범용기 제2권] (103)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그 배후 세력은?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11 11:12
조회
16

[범용기 제2권] (103)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그 배후 세력은?


물론 미국 손이 막후에서 움직였다.


이승만은 친미파라 하겠다. 그러나 미국에 맹종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일본을 자기 품속에 안아들임으로 중공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친교를 원치 않는다. 일본을 ‘적’으로 간주하여 동해에 Lee Line을 그어 황금어장을 한국어획구역으로 선포한다.


그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어부들을 체포하여 부산에 억류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승만의 배일정책이 싫었다. 그래서 갈아치우려 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이승만은 일본식 군벌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다. 하야 권고를 받았을 때 “민의가 그렇다면 하야 해야지!”하고 맨발로 걸어 효자동어구까지 나왔다고 한다. 길가의 군중들은 통곡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제스츄어’ 만으로도 ‘민주적’이다. 초기의 소, 중, 고, 대학을 포함한 학원자치도 ‘민주교육’의 모본이었다.


허정이 대통령 직무를 대행했다.


위에서 본대로 이승만 퇴진은 자발적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성격으로 본다면 자기 수중에 있는 군대와 경찰력을 총동원하면 학생과 시민을 얼마든지 눌러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한 것은 미국의 압력이 적극적으로 작용한 탓이었음이 분명하다.


4ㆍ19와 미국 관계는 좀더 자세하게 적어둘 필요가 있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은 미국이 몰아낸 것이었다.


4월 19일 – 미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 매가나기 참사관 등은 반정부 데모에 대한 미국의 깊은 관심을 포명했다.


4월 20일 – 미국무성과 주한미국대사관은 다시 한국 사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표명했다.


4월 24일 – 미국무성과 미주한대사관은 ‘데모’에 대하여 방관 태도에서 참여태도에로 변경했다.


이기붕의 공직사퇴 성명과 이승만의 자유당총재사임 성명은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4월 25일 – 이승만은 허정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고 미국과 절충하게 했다.


4월 26일 – 미국대사관 메가나기가 대통령 관저를 방문한 직후인 10:30AM에 이승만은 미국의 의향에 따라 아래와 같은 퇴진 의사를 표명했다.


“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해도 좋다. ② 이기붕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킨다. ③ 정ㆍ부통령 재선거를 실시해도 좋다. ④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로 개헌해도 좋다.”


같은 날 오후에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열고 이상의 네 사항을 가결하고 아래의 네 사항을 다짐했다.


“①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② 3ㆍ15 정ㆍ부통령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 내각하에서 완전한 내각책임제 개헌을 실시한다. ④ 개헌 후에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거를 실시한다.”


4월 27일 – 이승만이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 사임서는 즉시 수리되고 허정이 과도내각을 조직했다.


퇴진한 이승만은 돈암장에 우거했다.


이승만 대통령 사임과 함께 함태영 부통령도 물론 사임했다.


그에게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은 그에 대하여 아무 기대도 책임도 묻는 일도 없었다.


그의 막내 아들 함병춘이 아버님인 ‘함옹’을 모시고 돈암장에 갔다. 밤이었다 한다.


두 노인은 아무 말없이 손을 잡고 서로 쳐다보다 헤어지더라도 ‘병춘’은 말했다.


허정은 국민 몰래 이박사를 하와이로 피신시켰다. 그는 거기서 뇌출혈인가로 불수가 됐다.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으나 종말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의 반려자의 간호는 극진했다고 들었다.


결국은 숨을 거두게 되었다. 후일에 유해가 한강 건너 동작동 국립묘지에 옮겨져 초라한 무덤이 외롭게 남았다. 내가 가 본 때에는 묘비도 없는 작은 ‘사마귀’였다.


그 후에 그의 세도로 벼락 출세했던 사람들이 ‘부토’도 하고 비석도 세웠다고 들었다.


이 박사는 한문에 능하고 서도(글씨)에도 자가류를 이룬 ‘능필’이었다.


어떤 분이 이박사의 자작시를 자필로 쓴 열폭 병풍을 국전에 전시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자유 능숙한 필치에 감탄했다. ‘명필’이 아니라, ‘능필’이었다.


이승만 박사 집권동안에 실종 또는 암살된 거물급 인사가 너무 많았다. 그것은 후세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김구 – 그는 임정 주석이었다.


여운형 – 그는 임정의 외교관으로 웅변가였다. 그리고 좌ㆍ우익에 교류의 ‘루트’를 마련하려 했다.


장덕수 – 언론가, 동아일보의 거성이었다.


김능진 – 그는 Y 총무였으며, 이박사 단독 선거구에 경쟁자로 출마했다가 행방불명됐다.


조봉암 – 사회주의 정치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체포되어 공산주의자로 몰려 교수형을 받았다.


그 배우에 미국 CIA가 움직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박사의 자신의 ‘히스테릭’한 반공사상이 곁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될 수는 없었을 것이 아닐까?


그 직접 하수자는 ‘극우’의 과격 청년들이었다.


이기붕과 그 가족은 이승만에게 양자로 입적했던 자기 아들 ‘이강석’의 총탄에 맞아 전 가족이 몰사하고 이강석 자신도 그 권총으로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그야말로 완전한 패가망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