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2권] (2) 해방직전 “일제”의 발악상 – 서울 목사들의 수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02 09:11
조회
1957

[범용기 제2권] (2) 해방직전 “일제”의 발악상 – 서울 목사들의 수난


1940년 4월이었다. 조선신학원은 자리잡혀갔다. 이 사건은 조선신학원이 발족한 해 2학기 때였다고 기억된다. 설립자 김대현 장로님이 숙환인 천식증으로 별세하셨다.


서울 교계에서는 장례식이라도 성대하게 해 드리려고 합의되어 초교파적으로 장례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식순까지 작성되었다. 그런데 장례식 이틀 앞두고 시내 목사 40여명이 피습 연행되었다.


윤인구 목사도 같은 그물에 걸려 갔다. 새벽 4시에 종로 경찰서 형사들이 담장을 넘어 침입했다고 한다. 나는 “도농”에 있었는데 일찍 출근해 보니 사태가 그 꼴이었다. 상주들과 의논하여 장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집례 순서에 든 각 교파 목사들 대신에 같은 교파의 장로들로 순서를 메꿨다. 남아 있는 목사라곤 나밖에 없다. 그래서 총집례자로서는 내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새로 된 장례위원들을 소집하여 의논하고 결정했다. 장지는 고인의 소유임야인 관악산 뒷기슭에 이미 준비돼 있었다.


장례식 날 아침에 남대문 밖 교회 김영주 목사가 석방돼서 예식에 참여했으나 순서를 드는 것은 사양했다.


“이럴 땔수록 더 극성스레 일해야 합니다”하고 격려햇다.


나는 전체 학생을 합반하여 구약, 신약, 교회사, 목회학 할 것 없이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연속 강의했다. 얼마든지 계속할 것 같았다.


하루는 종로 경찰서 “가나자와”(金)란 신학원 담당 형사가, 강의 중의 나를 불러낸다.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따라 갔다. 지하실로 갔다. 벽에 고문하는 도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구석에 작은 취조실이 있다.


“당신, 신령회에 들어 있지요?”


“‘신령회’란 금시초문인데요.”


“교회 지도자로서 ‘신령회’를 모른다니 말이 되오?”


“말이 되든 안되든 모르니 모른달 수 밖에 있소?”


“당신도 들어가야 하겠소.”


“그거야 당신네 권한이니까, 끌어가면 끌려가는 것이지요.”


“그럼 올라갑시다.”


“좋소, 올라갑시다.”


이번에는 고등계 주임실 낭하 의자에 앉혀 놓고 자기는 주임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나와서야 안 일이지만 학생들이 울끈불끈, 몹시 흥분했던 모양이다. 학생이래야 1, 2학년이니까 청년에서 중년에 든 전도사, 장로로서의 ‘베터랑’이다. 장희진, 오덕유 등이 그때 졸업반이었다.


결국 ‘가나자와’ 형사는 주임실에서 나왔다.


“당신도 의례 잡아 넣어야 할 것이지만, 당신까지 없어지면 학생들이 흩어져서 제각기 자기 고향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이 소란하게 될 우려가 있으니까 당신을 돌려보내는 거요. 나가서 수업을 계속하더라도 말조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는 대로 연락하시오!”한다.


나는 말없이 나왔다. 학생들의 환호성은 대단했다.


서울 목사들이 40일 동안 갇혀 있었다. 심문도 조서 작성도 없었단다. 기(氣)를 꺾으려는 일종의 ‘시위’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모두 나왔다.


그 후부터 목사들 동지섣달에 우이동 끌고 가서 ‘신도수련’이랍시고 알몸에 얼음냉수를 퍼붓고 동방요배 시키고, 못하는 일이 없게 됐다. 윤인구는 넉넉한 집안에서 고생없이 자란 사람이라 유난스레 ‘온유’해졌다.


한번은 국학원대학을 졸업했다는 조선인이 피어선 성경학교 강당에서 ‘신도’ 강의를 한다고 시내 목사들을 모두 모이라 했다.


다 갔다. ‘신도’만이 아니라, 일본의 종교는 모두 ‘호국종교’다. 기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조선의 기독교가 살아 남으려면 대일본제국의 호국종교가 돼야 한다. ‘황도’는 ‘일시동인’, ‘팔괭일우’ 정신이다….


그때 이 모임의 주최자는 감리교 총리원의 ‘이동욱’이었다. 변홍규는 ‘통리’였으니까 저절로 말려들었던 것이다.


폐회하고 나올 때, 김영주 목사는 “개새끼 개소리치고 있다”, “다시는 이런데 안온다!”하며 잔뜩 성이 났었다.


그런데 서울 목사들은 우이동에서 ‘미소기’(淨潔禮) 훈련에서 성적이 좋았다는 평가 때문에 점차 더 깊이 말려들게 됐다. 모두 ‘부여신궁’ 건축공사에 끌려갔다. 머리를 빡빡 깎고 합숙하면서 본격적인 신도 수련을 받았다. 거기서도 성적이 우수했단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단으로 일본 전국에 중요한 신사, 신궁에 모조리 순례하게 했다. 성직자, 하느님의 사자로서 무던히 욕 본 셈이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도 내게는 도대체 말이 없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나는 그 내막을 잘 모르고 있다.


나는 만주의 동만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동만노회원이 됐다. 내가 서울에 옮긴 후에도 동만노회원으로 있었다. 얼마 후에 만주의 기독교 각교파가 합하여 만주기독교회가 되고 동만노회는 발전적으로 해소됐다.


그때 동만노회에서 내게 문의해 왔다. 그대로 만주노회원이 되겠느냐, 지금 서울에 있으니 경기노회에 이명하려느냐, 본적지 교회에 옮기겠느냐? 속히 회답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함북노회에 이명해달라 했다. 그래서 함북노회원이 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함북노회에서는 ‘부재회원’(不在)으로 돼 있었다.


내가 서울 노회원이 아닌한, 서울노회로서 내게 행동통일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함북노회로서는 부재회원에게 노회로서의 실무를 요청할 수가 없다. 내게는 조선신학원 이사회의 결의에 복종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초연했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알고 나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건 나의 추측이다. 다른 어떤 사회적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신앙적으로 본다면 하느님이 어떤 미래를 위하여 나를 “예비역”에 넣어둔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