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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생애와 사상

長空 김재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

1. 인간 김재준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 등과 함께 1901년 20세기 첫 해에 출생한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함경북도 경흥에서 ‘유가적 가풍’ 가운데 자라나 선비적 기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무척 과묵하고 점잖아서 인격과 인품을 높이사 젊은 시절부터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기독교신앙’으로서 성 프란시스를 매우 존경하여 ‘청빈'(또는 성빈)을 늘 마음에 새기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평생 자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제자들의 학비 보조에 썼다.

그는 소시적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고 타고난 문장가였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김재준 전집>(전 18권)을 보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설교와 논문, 수필과 자서전 등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수많은 글을 써서 시대를 깨우치고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려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우리 교회와 사회, 그리고 우리 민족을 사랑했다. 그가 작시한 우리 찬송가 261장 “교회의 노래”에도 이런 그의 정신이 짙게 배어 있다.

2.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김재준

1935년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서양 선교사가 그들의 본국으로 모두 돌아가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 후견인시대'(1885-1935)를 마감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이때 새로운 시대에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 지도자와 신학적 비전이 필요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로운 가죽부대가 요청된 시기였다.

서양 선교사가 이끌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음으로 인해서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이 전무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를 자주적으로 양육하려는 ‘조선신학교’ 가 설립된 것이다. 김대현, 송창근, 김재준 등 ‘창조적 소수자’들이 미래의 비전을 내다보면서 규모는 작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신학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닌 순수한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학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 즉 1940년 일제 암흑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돌아가 재정 지원이 한푼도 없던 그 시절에 조선인들 스스로 조선 교회 목회자를 육성해내는 신학교육기관을 자주적으로 세우고 지속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신앙 결단행위이었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었고, 당시 조선기독교의 장로교회가 정식으로 인정한 신학교였다. 김재준 목사가 1940년 조선신학교를 개교하며 천명한 신학적 건교이념은 세계적 개혁신학 전통을 바르게 계승하는 중심적인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3.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와 김재준

1953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성경 해석, 곧 김재준 목사의 새로운 ‘성경연구방법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순수한 신학적 이유 외에 더 많은 비본질적 요소들이 상승작용을 해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교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극적 교회사 사건이었다. 예를 들면, 해방 후 다시 귀국한 서양 선교사 세력들의 교권지배 의도와 당시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의 결탁이 불행한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신학을 내세우고, 새 시대 새로운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으려 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신교의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숫자라는 힘으로 단죄하고 추방시켜버린 결과로 기장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신학교 설립정신과 복음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장은 한국 장로교의 본류를 이어가는 교단이다.

새롭게 형성된 기장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 학문 연구의 자유와 성서연구방법론의 수용, 바리새적 경직신앙의 철폐와 살아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생활화, 노예적 의존사상 극복과 자립·자주적 신학 형성, 세계교회 형제들과의 연대 강화 등을 기본 정신으로 천명하였고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4. 장공 김재준의 신학사상

장공 신학의 중심 주제는 ‘현실의 변혁’이다. 성과 속, 하늘 나라와 거룩한 것의 이원론적 구분 속에서 현실의 것을 소홀히 하는 일반 기독교인의 정서와는 달랐다. 그는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는 않으면서 현실 속에 들어가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에로 변혁해 가야 한다는 ‘생활신앙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성경말씀을 교리적 차원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현실적 삶의 언어로 파악하였다.

그는 근본주의적이고 답답한 교리주의적 기독교이나, 교파 중심적 기독교 선교신학이나, 탈역사적 타계주의 신앙이 아니라, 더욱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기독교 신앙과 생활신앙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화간, 종교간, 교단간 화합과 협력을 위해 앞장섰다. 그의 이런 신앙과 신학사상은 한국교회(KNCC를 중심으로)의 에큐메니칼 운동(일치, 협력, 연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 개신교, 특히 기장의 성격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5. 장공 김재준의 사상과 정신

장공의 사상과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민주와 평화’, ‘인권과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장공의 사상은 철저히 민주주의적이며, 인간 평등사상이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가르치는 성서적 세계관, 노동의 신성성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마태복음 5:3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렇게 몸으로 실천하며 가르쳤다. 1960-70년대에 그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현실 정치의 민주화투쟁 최일선에 나선 것은 그의 이런 분명한 소신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그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현실 정치와 사회 참여에 앞장서도록 이끈 선도자였다.

최근에 알려진 장공 김재준 목사의 좌우명을 소개한다. 여기에 그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의 座右銘 : 바로 살려는 노력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 열 가지를 정하여 바로 살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