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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씀하신 선생님 / 박봉양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04 17:11
조회
1207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씀하신 선생님

박봉양 목사(증경총회장)

내가 장공 선생님을 최초로 대하게 된 것은 1954년 한국신학대학 입학시험 면접 때였다. 그야말로 볼품없는 가난한 모습이었다. 본래 용모가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데 학교 형편도 제대로 봉급을 드리지 못하는 때이니 가히 짐작이 가는 것이다. 그러나 54년부터 그가 소천(所天)하시기까지 약 35년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그렇게 짧은 기간도 아닌 듯싶다. 그러나 감히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님을 이렇다 저렇다 하기에 역부족인 것은 스스로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장공만큼의 인격이나 학문에 이르렀다면 혹시 장공님을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를 따를 만한 인격도 학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나에게 비친 장공 선생님의 지극히 적은 부분의 소감을 기록함으로 장공 선생님의 모습의 전체를 형성하는데 공헌을 할 수가 있다면 선생님의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게 될 것이다.

신학교 시절의 장공에 대한 회상

첫째로 내가 신학교 시절의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고자 한다. 당시 우리 장로교회는 분열의 큰 진통을 겪고 있는 시기였다. 입학을 할 때 그분이 누구인지도 알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입학 과정에서 한국신학대학과 장로회신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입학 후에 바로 당시 경기노회가 둘로 갈라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우리들은 신학교 1학년으로서 가장 용감한 군대와 같았다. 그러므로 사생결단하고 투쟁하여야 된다고 믿었다. 공부도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러나 장공 선생님은 태연하였다. 그도 인간이기에 자신이 정죄되어 제명되고 총회가 갈라지고 노회가 갈라지는데 평안할 리가 없겠지만 그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흩어진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일 학년 입학 후에 선생님의 첫 강의 시간이라 생각이 난다. 그는 첫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대단한 열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다 된 줄 생각하고 신학공부에 임할는지 몰라도 나는 평범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른이 된 줄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 볼 때 신학교에 오기까지에는 대단히 자부심을 가지고 왔지만 그것도 별로 인정하지 않으니 겸손하게 새로 시작하라는 말씀인 줄로 생각된다.

당시 선생님은 주변에 있던 친구도 떠나가고 교회도 떠나가고 당시(6ㆍ25 직후) 젖줄이 되어오던 선교사들도 떠나가고 고전 분투하는 시기였다. 여기에 학교 안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소위 말하는 ‘도끼사건’이다. 어느 날 조간에 대문짝 만한 글씨로 신학생이 애인을 도끼로 쳐서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사 내용에는 한신대생이라는 것에 모두 놀랐다. 지금 한신이 어느 지경인데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학생, 교수, 교회들이 아연실색하였다. 학교에 등교하니 온통 소용돌이였다. 그러나 장공 선생님만 무표정이었다. 여기서 나는 느꼈다. 너희들은 아직까지도 평범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일반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니 더도 덜도 생각지 않고 똑같이 생각하신다는 말씀이다. 당시 교회나 신학교 여건이 어떻든지 신학생도 별 수 없는 청년학생이니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일년이 다 못 되어 다시 ‘동자 위클리’ 사건이 터졌다. 당시에 상급학년 학생 중심으로 ‘동자 위클리’ 라는 프린트물이 배포되었다. (당시엔 학보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내용 중 “바보 하나님과 현명한 인간”이란 주제 논문이 말썽이 되어 학교 안이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 같았다. 수업도 되지 않았고 학생들 간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몇 명이 퇴학을 당하고 수습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를 수습하노라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장공 선생님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진정 그에게는 넓은 아량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장공 선생님의 강의는 재미없는 수업 중에 하나였다. 말없이 들어오셔서 안경 한 번 벗었다 쓰시고 학생들 한번 쳐다보시다가 다시 안경을 쓰시곤 수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질문을 하면 안경 한 번 벗었다 쓰시고 다시 강의를 계속하나 “그것도 몰라” 한마디하시고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강의는 날이 갈수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특히 선생님의 신학의 신론, 인간론, 구속론, 교회론 강의 등은 우리들의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게 하여 주었다.

어느 날 강의중 학생들이 “선생님 아무개가 미국의 프린스톤을 마치고 남산에 있는 신학교로 왔답니다” 하니 “그 사람 별수 있어 배운 것이 신학인데” 하시며 그의 특유의 웃음으로 웃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우리 학교 가까운 곳에 H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권사 한 분이 매일 아침 새벽기도에 ‘김재준이 죽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다고 하시면서 아직 내가 예수와 같지 못해 그를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태연 속에서도 인간적인 갈등은 있는 것 같았다.

졸업반이 되어가면서 선생님의 냄새는 점점 다감해져 가는 것 같았다. “너희가 졸업 후에는 필경 농촌교회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유념하여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금전거래가 분명하여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영수증으로 거래하도록 하고 둘째는 이성문제에 있어서 이성을 잃지 않도록 하라. 교회에 가면 적령기에 있는 어려운 처지의 처녀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불구자도 있고 박색도 있는데 동정에 의해서 저 여자는 내가 아니면 안되겠다 내가 목회자인데 저 불쌍한 여자를 구하여 주자하여 섣불리 동정적 결혼 같은 것은 금물이다. 목회자가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다. 이를 조심하라.” 여하간에 졸업할 학생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은 애정이 넘치는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았다. 오늘도 신학교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어머니 교수가 꼭 있어야 되리라고 믿는다.

선생님과 우리들은 수학여행을 떠났다. 경기도 여주 신륵사였다. 그러나 당시에 숙박 시설이 별로 마땅치 않아 민가에서 머물게 외었는데 한 방에서 남학생 여학생 선생님 모두가 같이 자게 되었다. 그래서 옷도 못 벗고 입은 대로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선생님의 모습이나 학생들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모두가 수세미가 되고 머리는 제멋대로 삐치고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흡족했다. 선생님과 격의 없이 함께 끼어서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더욱 선생님의 채취에 매혹되었다.

목회자 시절의 장공에 대한 회상

둘째로 졸업 후 목회자로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다. 졸업 후에는 선생님과 자주 대면하는 시간이 어려웠다. 그러던 중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동창회 임원회가 모이게 되었고 문제가 된 김정준 목사(당시 학장)와 전경연 목사를 각각 만나 뵙고 수습 방안을 협의하였으나 대단히 어려운 것을 느꼈다. 그래서 결국은 장공 선생님만이 해결하여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한 임원들은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중재하여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이를 거부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에게도 평범한 인간의 감정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이유인즉 자신은 김정준 목사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끼고 그가 오늘의 학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학장 취임식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집을 한 채 잘 짓고 마당을 정리하여 보니 마당 한 가운데 돌 뿌리가 보여서 이를 제거하려고 파보니 돌은 점점 켜져 그 집이 무너지겠고 안 캐자니 보기가 싫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가르키는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선생님은 분노하셨다. 당시 선생님은 타의(독재정권)에 의해서 학교에서 물러났던 때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노하심을 보며 어느 덧 늙어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경기노회에서 김 목사님을 강사로 초빙하게 되었다. 그때 그 모임의 사회를 내가 맡게 되었는데 일기가 어찌나 추운지 뒤에 앉아 있기에 매우 힘이 들었다. 그래서 이미 회갑이 지난지 오래되신 선생님이 얼마나 추우시겠는가 생각하여 설교가 끝나자마자 “선생님 추워서 혼나셨지요?”라고 하니까,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설교하면서 추위를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설교할 때는 추운 것 몰라”라고 하셨다. 우리 목회자들은 대체로 설교대에 서면 긴장하게 되니 추위나 더위가 별로 긴장하지 않을 것이니 추우면 춥고 더우면 덥다고 생각하였는데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께서 독재정권에 의하여 밀려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마치시고 귀국하시게 되어 우리 안성제일교회에 주일 설교를 부탁하여 모시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토요일날 오셔서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을 드시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강단에 올라가시게 되었다. 그때 말씀하시기를 “안경을 안 가져왔는데 어떻게 하지? 할 수 없지 그저 간단하게 설교하지”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배시간이 끝날 때가 되었는데 설교는 계속 되는 것이었다. 교인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시점을 목회자들은 알 만한 것이다. 그리고도 계속되어 설교는 한 시간 반만에 그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좀 길었나?” 하시는 것이다. 그의 제자인 나는 좋게만 여겼지만 교인들은 별로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교회 갱신과 민주화를 위해 전진하신 장공

장공 선생님에 대한 명상이다. 선생님은 한국교회를 갱신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새로운 학문에 접한 분이 장공 한 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몇몇 동지는 한국교회 갱신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신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동지들은 교권이나 교회 여건의 여러 이유를 들어 등을 돌렸다. 오직 선생님 자신만이 이단(異端)의 누명을 쓰고 공격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초지일관 변함없이 한국교회 갱신을 위하여 전진하신 분이다. 그는 진정 ‘죽으면 살리라’는 믿음에 확신이 있었다. 장공 선생님의 뜻은 잠언에 있는 말씀같이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지금은 한국교회 갱신에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였다. 한국교회 백년 역사에서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 중요하다면 한국교회가 교회되게 함에 있어서 역사가들은 김재준 목사를 빼어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 외로운 갱신, 소신 있는 신앙과, 신학은 한국의 민주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8ㆍ15 이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는 너무나 혼란하였다. 그 중에도 5ㆍ16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유신독재는 민족을 암흑으로 이끌어 갔다. 이때 개혁주의자 장공 선생님은 권력을 무섭다하지 않고 신앙 양심에 의하여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화 자유화를 외치면서 일어섰던 것이다. 그는 교권과 싸워서 승리한 경험을 가졌기에 정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을 따르는 종교인사, 양심적인 예술인, 제자와 후배들에게 불의에 항거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였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박정희가 종교법을 제정하여 사이비 종교를 제재하려고 하는데 김재준 목사님께 사이비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고 부탁이 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하셨다. 본래 불신자(不信者)의 입장에서 볼 때 사이비 종교의 한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이비를 규정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종교를 탄압하는데 악용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한 종교인으로서의 편협성이나 이기적인 사고에서 탈피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김재준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전체 교역자를 중심으로 교인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정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 것이다.

반면에 교단에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몇 사람의 독주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에 민주화운동에 따른 소위 온건, 강건의 물의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때 나는 김재준 목사님을 찾아 뵙고 경위 설명을 드렸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분명하게 박정희 유신제도도 문제이지만 교단 안에서도 어떠한 독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서남동 목사 등은 한 두 사람이 모이면 교회라고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해. 반드시 성례전이 베풀어져야 교회인 것이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시는 선생님을 다시 한 번 우러러 뵙게 되어다.

요새 우리 교계에 원로라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보통 이야기들이 원로 되시는 분들은 먼저 맡는 사람이 임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맡아서 이용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원로는 교계 신문에 매주간 무슨 대회, 성회 등에 사진이 빠지는 적이 없다. 그래서 요새는 고소까지 당하는 창피를 당하고 있다. 사람이 늙으면 그렇게 되나 보다. 후배들이 아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과거의 쌓은 공적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장공선생님께서는 그렇지 않았다. 누구든지 가까이 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분인 것이다. 모든 제자들에게는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용납해 주시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그의 꾸지람이나 거부감에 조금도 노엽게 생각지 않고 기쁜 마음,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서게 하여 주시는 선생님이시다.

마지막으로 장공 선생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가운데 문병을 하러 갔다. 그때 나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목사님 이번에 제가 교단 부총회장에 출마하였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그래, 할 때가 되었지” 하시면서 웃으셨다. 나는 이 부총회장 선거를 통해서 꽤 미운 사람이 생겼다. 아직도 선생님의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몇 분의 선배 목사님을 찾아 인사드리고 부총회장 출마를 말씀드리면 한결같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고 냉소적이고 비협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나를 이끌어 주시는 이주원 목사님만은 미국에 계시다 한국 방문차 오셨다가 내 소식을 들으시고 일정을 바꾸어 투표를 지켜보시고 결과를 보신 다음 내 손을 잡고 업어주고 싶다고 감격하시며 기뻐해 주셨다. 김재준 목사님이 보시기에 아직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학생과 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의 제자가 총회장이 된다는 것을 그렇게 당연시하고 격려해 주심을 보고 우리도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인색하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된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1987년 1월 27일 한양대학 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부총회장으로서 장례식 사회를 맡았고 총회장으로서 선생님의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서 미력하나마 정성을 다하였다. 선생님에 대해서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