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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늘 새롭게 회상되는 은사 장공 선생님 / 강원하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8 08:14
조회
1356

늘 새롭게 회상되는 은사 장공 선생님

강원하
(강원노회 공로목사)

[1] 장공 선생과의 첫 만남

1945년 3월 하순, 나는 당시 부민회관(府民會館) 뒤편 일본기독교 정동교회 안에 신학원이 있다는 소개를 받고 조선신학교에 입학하고자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신학원 사무실은 찾지 못하고 물어물어 찾은 곳이 교회 강당 위에 있는 이층 작은 골방 같은 곳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40대 중반 시골 신사와도 같은 양반 한 분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계셨다. 나는 그분이 직원인 줄 알고 “이번 학기에 신학원이 입학하고자 입학원서를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분이 입학원서와 입학에 관한 등사로 인쇄된 문서를 주시기에 받아들고 왔다.

일주일 후 준비된 입학원서를 가지고 신학원 사무실을 찾았다. 전에 계시던 그분이 혼자서 제출한 서류를 살피더니 즉석에서 입학을 허락한다고 하시며 4월 2일 화요일 11시에 입학식이 있으니 오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선신학원에서는 사무직원 혼자 입학원서를 받는 즉시 입학을 허락할 수 있는가 보다’ 하고 의아해 했다.

4월 2일 입학식은 정동교회의 예배실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학식은 식장에 신입생 7명만이 덜렁 참석한 초미니 입학식이었다. 그때의 신입생은 이일선, 은명기, 김춘식, 김익, 이광우, 정 씨, 강원하였다. 나는 입학식 때 비로소 사무직원으로 알고 대하던 분이 바로 원장이시며 구약학 교수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간 두 번 대면하였을 때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던 실례를 부끄럽게 여겼다.

강의가 시작되고 보니 오직 구약을 담당하시는 장공 김재준 교수 한 분뿐이셨다. 신약 담당 교수이신 일본인 마야우지 아끼리(宮內 彰) 교수는 3월 말에 징용으로 소집되어 가고, 시간 강사로 예수전을 강의하는 유호준 목사와 일본어와 일본 정신을 강의하는 일본기독교 정동교회 담임 목사인 무라기시(村岸) 목사뿐이었다.

수입이 시작되어 장공 선생이 매일 매시간 수업을 혼자서 감당하셨다. 장공 선생께서 강의한 과목은 ‘성서원론’, ‘구약개론’, ‘성서지리’, ‘성서석의’의 구약의 ‘아모스’, 시약의 ‘사도행전’이었다. 그 외에도 한두 과목이 더 있었으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한 학기에 받은 강의는 참으로 알찬 강의였다.

장공 선생께서는 당시 신학원 원장이자 구약학 교수이며, 그 밖의 모든 신학원 살림을 꾸려가는 경영자로서 또 학자로서 혼자 힘으로는 벅찬 피투성이의 전투를 벌이고 계셨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의 상반기는 조선신학원이 고사되기 직전이었다. 장공 선생께서는 빈사 상태인 조선신학원을 혼자 끌어안고 힘겨운 싸움을 하시면서 적은 7명의 학생들 앞에서도 미래의 환상을 보시고 진지하고 충실하고 열정적인 강의를 베푸셨다. 강의에 임하시는 하늘의 용사와도 같은 선생님의 영상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나의 마음에 남아 있다.

[2] 신학교 학장 교체 때의 일

해방을 맞은 다음해인 1946년 3월 초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김재준 학장에서 송창근 학장으로 교체되었다는 이사회의 발표가 전교 학생들의 경건회 예배 후에 있었다. 나는 그 발표를 듣고 큰 충격을 받고 곧 교무실로 들어갔다. 마침 장공 선생님은 교무실 중간에 홀로 외로이 서 계셨다. 나는 선생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 학장 인사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고 마음에 가득한 감정이 울음으로 폭발하여 장공 선생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울어 버렸다.

장공 선생은 1980년대에 집필한 『범용기』에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신학교 학장직을 송창근에게 물려주었을 때 조선출은 명동 어느 다방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나까지 초청하였다. 강원도에서 개척교회를 목회하는 강원하는 나를 찾아와 통곡을 하였다. 같은 사건에서도 세태는 이렇게 두 극(極)을 달렸다.”

장공 선생과 송창근 선생은 친형제보다 더 깊은 관계로 지내온 사이였으나 위의 글에서 학장 교체에 대한 장공의 숨은 심정의 일단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때 나는 철없는 초년 신학생으로서 세상물정이나 교계의 정치 판도와 같은 제반 사정에는 전혀 일자 무식한 철부지였다. 그러나 1940년 조선신학원 개교 이래 6년간 지켜온 조선신학교인데 이제 일제가 물러가고 희망찬 새 역사가 전개되는 이 시기에, 불과 해방 8개월 만에 학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이사회의 처사에 나는 분통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그 동안 느끼기에는 일제 최후의 발악의 문턱 밑에서 일제시대 조선신학원의 마지막 학기를 지탱하시던 장공 선생의 모습은 순교를 앞둔 결의에 찬 장렬한 모습이셨다.

또한 일제의 그 암흑기에 신학원을 찾아와 온갖 역경을 함게 나누며 3년간 신학훈련을 받은 6회 졸업예정자들은 한 학기만 더 장공께서 학장직을 계속하셨더라면 그들은 김재준 학장명의 졸업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한 배려없이 서둘러 김재준 학장을 교체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성급한 처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전 교직원이나 300여 학생들 모두 새 학장 취임을 환영하는 분위기인데 나만 불만을 품고 울었다는 것이 장공 선생의 마음에 혹 위로가 되시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30여 년이 지난 사건을 『범용기』에 언급하시지 아니했겠는가 사료되는 것이다.

[3] 유언으로 남기고자 하신 『오버린 전기』

1946년 8월 방학중에 장공 선생께서 병환으로 몸져누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낮에 병문안차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장공 선생께서 서재에 계신다고 하여 서재로 들어갔더니 뜻밖에도 장공 선생께서는 8월의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시고 작은 상에서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나는 놀라서, “목사님, 무엇을 쓰십니까?”하고 여쭈었다. 장공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병에서 나아 일어날 자신이 없어. 그래서 내가 지금 죽으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남길 것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래서 유언으로 이것을 남기려고 지금 『오버린 전기』를 번역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죽음을 앞두고 목회자가 될 학생들을 생각하시는 은사의 그 뜨거운 제자 사랑에 감격하였던 것이다.

장공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방학 동안에 완쾌케 하시어 선생님은 9월 학기에도 여전히 강의하실 수 있었다. 병상에서 유언으로 남기려 하신 『오버린 전기』는 그해 12월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되었다.


오버린은 1740년에 태어나 1826년에 돌아가신 프랑스 신교 목사로, 프랑스 보수 산간마을 교회에 부임하여 그곳에서 평생을 바쳐 목회하면서 교인들의 생활 향상에 온 힘을 다 쏟았던 분이시다. 오버린의 땀과 기도로 그 산간 농촌마을은 크게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장공 선생께서 그의 유언으로 『오버린 전기』를 남기시려 하신 뜻은 제자들에게 오버린과 같은 목회자가 되어 한국사회를 변화시켜주길 주문하시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