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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4장 : 배움의 길에 서다(1927-1932) - 신정통주의에 매료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7 09:38
조회
869

[장공의 삶] 4장 : 배움의 길에 서다(1927-1932)

신정통주의에 매료되다

김재준은 프린스턴에서 1년을 공부한 뒤 송창근이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는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 2학년에 편입했다. 웨스턴신학교는 1785년 시작되었다. 이 학교는 미국 장로교회의 직영 신학교였다. 그 후 1825년 ‘웨스턴’이라는 교명을 갖게 되었다. 당시 1825년에는 서부 개척이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따라서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 시가 미국의 서부였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소속 교단은 북미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와 통합되었고, 1958년 피츠버그 크세니아신학교와 통합, 그후 1959년 피츠버그 신학교로 개편되었다. 현재 피츠버그신학교는 미국 장로교회(P.C.U.S.A) 소속 중 한 신학교 이다.88)

김재준은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인 웨스턴신학교에서 학비, 기숙사비를 모두 면제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장학금도 300불이나 더 받았다. 그러나 식비는 해결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재준은 웨스턴에서 방학 동안 식당과 농장을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웨스턴으로 옮긴 뒤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고 기초부터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약학을 전공으로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히브리어 과목은 모조리 수강했다. 부전공으로는 조직신학을 선택했다. 김재준은 학업성적이 우수했다. 한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이 A학점이었다. 그는 웨스턴신학교에 온 지 2년 반 만인 1932년 5월 졸업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좋았다. 특히 히브리어는 상까지 받을 정도였다. 김재준의 신학사 졸업논문은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이었다. 신학 석사 학위논문은 「오경 비판과 기원전 8세기 예언운동」이었다. 두 논문 모두 구약학에 관한 것이었다. 김재준은 구약성서 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구약을 전공으로 한 김재준이 이해한 말씀은 무엇인가?

김재준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89) 김재준이 바라본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구속의 경륜과 구속주의 출현과 구속함 받고 영생 얻는 길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로서의 하나님 말씀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 즉 전 우주를 구원하는 역사와 방법,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김재준은 이해했다.

김재준이 이해한 신정통주의로서의 말씀은 철저히 구속사적 이해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은 한국 역사 속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구속사적 이해는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 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내용이다. 김재준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로서 한국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불의에 대해서 항거하고 의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것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김재준은 모든 학업을 마치고 졸업할 무렵, 어느 선교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직장 소개와 관련하여 신학노선을 묻는 질문이었다.

“네가 학업을 마쳤으니 귀국해야 할 텐데, 네 신학노선을 알아야 직장을 소개할 수 있겠기에 편지한다. 네가 근본주의냐?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라야 취직이 될 것이니 그렇기를 바란다. 속히 알려라.”90)

이에 대해 김재준은 곧 답신을 보냈다. 자신은 근본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닌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자라고 말이다.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박을 수가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91)

어느 선교사가 보낸 이 편지는 당시 한국적 교회의 상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근본주의라는 교리주의에, 교권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한국 교회를 김재준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네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법복 입은 성직자냐?
색유리 창으로 스며드는 화광이냐?
높이 들린 제단이냐?
네가 무엇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가느냐?
조직된 설법과
감미로운 성가더냐?
성당은 고딕으로 장엄하고
제단은 꽃으로 아름답다.
거룩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의 거룩으로
도착되면서부터
종교성은
매혹의 자장가로 잠들었다.”92)

김재준은 정통주의 신학의 노예로 있던 한국 교회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정통주의 신학에 근거한 교리주의, 율법주의, 교권주의, 교회주의, 성직주의에서 해방시키길 원했다. 이 해방의 통로로서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한국 교회를 안내했다. 정통주의 신학이 갖고 있는 폐해성을 정확히 파악했으며, 그 대안으로 신정통주의를 소개한 것이다. 김재준이 바라본 정통주의 신학은 자신의 신학과 교리와 신조를 최우선으로 삼는 신학이다. 결국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닌 정죄의 심판을 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율법의 종교로서 관념체계를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된다.93) 또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닌 관념체계에 따라 인간을 대하고 차별하여 비인간화시킨다.94) 그리고 정통주의 신학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우상숭배로 이끈다. 자신의 교리와 자신의 신학만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해진다.95) 김재준이 거부한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이 만든 죽은 교리와 신조로 인간을 구속하는 신학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적인 신학이었던 것이다. 김재준은 이러한 정통주의 신학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 교회가 자유케 되길 원했다. 말씀의 신학인 신정통주의 신학에로 나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특히 한국 장로교회는 철저한 교리주의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1934년 한국 교회 첫 희년 예배에서 마펫(S. A. Moffet, 마포삼열) 선교사는 40년 전 선교사가 전한 복음 그대로를 전하라고 권고했으며, 박형룡은 내 신학은 따로 없고 남의 집 화원에서 꺾어온 꽃다발이라고 하면서 선교사들의 신학을 정통신학이라고 하였다.96)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재준은 사회적 책임성을 결여한 타계주의적 신앙, 그리스도의 인격적 친교를 방해하는 교리적 신앙,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개인주의적 신앙을 한국 교회의 문제점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 참여를 해야 하며 “생활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주의 신학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거부한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교회와 정치는 구분되어 있지 않다. 교회와 정치를 구별하여 창조하지 않으셨다.97) 또한 정의와 분리되지 않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인과 사회 모두를 위한 회개, 역사적 상황에서 고백되어진 신앙과 양심이 바로 이것을 방증한다.98)

김재준이 추구하고자 한 신정통주의로서의 교회는 참여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가 기독교 정당의 창립이나 혹은 정치권력의 획득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우리 민족에게 맡겨진 민족적 과제, 역사적 과제를 교회가 어떻게 풀어나갈 것이냐에 대한 신학적 응답을 신정통주의에서 찾았던 것이다.

김재준은 프린스턴과 웨스턴을 거쳐 드디어 석사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학위를 받고 학문적 무장을 마친 채 송창근, 한경직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작정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연합장로교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한국과 한국 교회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김재준은 “나 같은 사람도 여기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여비만 되면 돌아 갈 작정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한국 교회의 사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돌아오는 시기에 김재준은 깊은 사색과 함께 신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기로 굳게 다짐했다. 역사에 참여하는 신앙인으로 살기로 다짐한 것이다.

[각주]

[88] 위의 책, 74. [89] “신정통주의의 역사적 고찰”, 『전집』, 제5권, 39.
[90] “어느 선교사의 편지”, 『전집』, 제13권, 119.
[91] 위의 글, 119.
[92] “어떻게 살 것인가”, 『전집』, 제18권, 352~353.
[93] “크리스찬의 인간상”, 『전집』, 제3권, 132.
[94] “권고의 날”, 『전집』, 제4권, 41.
[95] “정통과 이단”, 『전집』, 제11권, 78~79.
[96] 주재용, 『역사와 신학적 증언』(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278~280.
[97] “교회와 국가”, 『전집』, 제16권, 232.
[98] “교회와 사회”, 『전집』, 제2권, 22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