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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3장 : 복음에 마음을 열다(1920-1926년) - 믿음의 결단을 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3 08:58
조회
843

[장공의 삶] 3장 : 복음에 마음을 열다(1920-1926년)

믿음의 결단을 하다

초가을이 지나고서야 콜레라가 수그러졌다. 김재준은 서울로 올라가 학교에 갔다. 그러나 진도가 너무 앞서 있어서 수업을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김재준은 학교를 포기하고 경성도서관 종로지관에 나가 독서를 했다. 주로 일본어 문학서들이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톨스토이 전집,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을 탐독하면서 인생에 대한 탐구심도 생겨났다.36)

이 무렵, 서울시내 장로교회 연합사경회가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강사는 깡패 두목이었다가 회심한 김익두 목사였다. 그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인도하는 집회였다. 병 고치는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졌다. 예배당 안이 가득 차서 사람들은 바깥 뜨락이나 담장 위에까지 앉았다. 김재준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웬일인가 하고 가보았다. 김재준이 찾아간 날은 연합사경회 마지막 날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창세기 1장 1절을 갖고 설교했다.

“마감 날이었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갖고 설교했다. ‘닭이 달걀에서 나오고 달걀이 닭에서 나오고’ 이렇게 암만 따져도 해결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포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만들어서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만물 중의 하나요,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사람의 이치 따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당신 생명 속에 말씀 하실 것이요!’ 그때부터 여러분은 ‘새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이오! 등등 나는 ‘옳다! 나도 믿겠다!’ 하고 결단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쟁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37)

김익두의 설교에 사로잡혀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 하고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다. 그러자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령의 기쁨이 넘치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김재준은 성령 체험과 함께 말씀의 은혜에 사로잡혔다. 그가 거듭 나기 전에 읽었던 성경은 단지 하나의 책이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은 그에게 ‘드러난 계시의 책’이었다.

“성경! 구도자의 이 이상한 책 언제나 새로운 책 가리우면서도 드러난 책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문학을 읽는 것같이 상상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철학을 읽는 것같이 사색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역사를 읽는 것같이 돌멩이 삶는 것과 같은 사실만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과학을 읽는 것같이 실험과 분석의 기록도 아니었고 동양 종교에서와 같이 음침 신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38)

김재준은 회심하고 난 후 서울에 있는 여러 교회를 두루 다니면서 예배를 드렸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가 교회의 생명이라고 느꼈다. 기왕 믿을 바에야 진지하게 믿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이제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믿을 바에는 진지하게 믿는다고 결심했습니다. 외식이나 직업적이나 흉내내는 따위 신앙은 경멸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설사병에 걸렸다고 느꼈습니다. 씹지 않고 통째로 삼켰기 때문입니다. 씹는다는 것은 진지한 비판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도서관 독서생활은 나의 후일의 신학 수련을 위해서도 보탬이 되었습니다.”39)

김재준은 ‘그냥 믿지 않고, 진지한 비판을 통해서’ 믿기로 작정한 것이다. 김재준은 종로에 있는 YMCA 회관에서 매일같이 지냈다. 당시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이 학생들과 민중과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키우고 민족문화 발굴과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실천했던 것이다. 김재준은 매주 오후 2시에 있는 일요강좌를 빠짐없이 참여했다. 김재준은 이 강연에서 민족과 종교,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배우고 생각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이상재가 강연할 때였다.

“여러분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돼! 민족이니 나라니, 하면서 정치를 모르면 뭐가 되나. 정치라는 것은 저쪽에서 ‘장군’ 하면 이쪽에서 ‘멍군’ 할 줄 알아야 한단 말이지.”40)

김재준은 이상재의 이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정치는 상호소통과 협력이다. 독선과 무조건 배타가 아니다. 김재준은 매일 잡지실에 들러 《개조》, 《중앙공론》 등과 같은 잡지를 읽으면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김재준은 YMCA 회관에 있으면서 영어 전수과 3학년에 들어가 1년 정도 다녔다. 같은 반에는 훗날 감리교 신학교 교수가 된 정경옥도 있었다. 김재준은 이곳에서 졸업시험을 쳐서 1등을 했다. 그러나 1년 내내 수업료를 내지 못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김재준은 한동안 백부가 설립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일했다. 백부는 월간 종합잡지, 『서울』과 학생을 위한 월간지 『학생계』도 냈는데, 김재준은 잡지 『서울』을 편집하는 장도빈 선생의 조수로 일했다. 당시에 중학생들이 유교적인 조혼의 희생자여서 연애결혼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혼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무리한 이혼을 하느냐 아니면 억지로 화해냐’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속병을 앓고 있었다.

김재준도 스무 살 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조혼의 희생자였다. 그도 역시 이혼이냐 연애냐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결단을 할 겸, 또한 결혼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겸 『학생계』에 투고하였다. 이 글에서 김재준은 이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아내의 인생을 생각해서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내 된 여자의 세계는 다르다. 그들은 결혼과 함께 그 운명은 숙명으로 굳어져 출구가 없어진다. 그녀는 그의 사람이요, 그 가문의 사람이다. 그 이와 그 가문에서 버림받는 순간 그녀의 삶은 무(無)가 된다. 이혼이란 관문의 빗장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처지는 비극이다. 그러나 이혼당한 아내란 여인의 경우는 더 큰 비극이다. 그녀는 무너진 하늘 밑, 버림받은 무덤 속에서 산다. 그녀의 푸른 원한이 모든 삶에 서리를 끼어 얹는다. 그렇다면 위대한 미래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자기를 하늘같이 믿고 목숨같이 아끼는 한 인간을 짓밟고 내쫓고서 민족이나 국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진짜 철면피가 아닐 수 없다. 이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 하고서 민족과 나라를 말하지 말라!”41)

미래를 꿈꾸는 학생이 이혼을 통해서 어찌 한 인간의 삶을 비극으로 내몰 수 있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민족과 나라를 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김재준이 자신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아내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평등을 침범할 권리가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모든 문화유산의 꼬리표가 붙기 전 인간, 즉 인간이라는 그것 때문에 인정해야 하는 인간에게 무조건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내 아내의 인간적 존엄, 자유, 평등을 침범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운명을 사명으로 변질시키려는 은혜의 질서에서 주님의 연민을 구할 뿐이다.”42)

이 글은 2등으로 당선되어 『학생계』에 실렸다. 최초로 인쇄물에 쓰여진 글이다. “글을 써낸다는 것은 쓴 사람이 그만큼 스스로의 삶에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43)는 그의 글처럼 김재준은 부모가 맺어준 아내와 일평생 함께했다.

[각주]

[36] “조약돌 몇 개”, 『전집』, 제18권, 405. [37] “1920년대 서울풍경”, 『전집』, 제13권, 48.
[38] “순례의 길(2)”, 『전집』, 제2권, 200.
[39] “조약돌 몇 개”, 『전집』, 제18권, 408.
[40] “중앙 YMCA”, 『전집』, 제13권, 50.
[41] “인쇄된 첫”, 앞의 책, 51-52.
[42] 위의 글, 52.
[43] 위의 글,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