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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2장 : 현실의 벽을 보다(1916~1919년) - 회령군청에 취직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2 07:59
조회
788

[장공의 삶] 2장 : 현실의 벽을 보다(1916~1919년)

회령군청에 취직하다

김재준이 회령농업학교를 졸업할 무렵 회령군청 간접세과 임시 고원으로 채용되었다. 향동학교 시절 김재준을 가르쳤던 김희영 선생의 추천이었다. 그는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판인관이 됐다. 재무부 주임이나 그의 직속상관인 간접세과 수석 모두 일본인이었다. 회령군청은 김재준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차별감이 없는 평등한 분위기였다. 김재준은 이곳에서 시내를 돌아다니며 양조장 관리, 밀주 단속, 담배 무허가 경작지 단속 등을 맡았다. 관내를 단속할 때는 주임서기와 같이 간다. 보통 20여 일 걸리는 장기 출장이었다.

한 번씩 관내를 돌아다니며 범법자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상사에게 보고할 건수를 찾게 된다. 잘못 걸리면 20원 벌금이다. 가난한 살림에는 큰 부담이다. 김재준이 회령군 용흥면 영천동 일대를 돌 때 범법자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재가승들이 산다는 ‘멱사리골’ 근처에 갔다. 재가승 마을은 여진족 패잔민이 정착해서 형성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 외딴집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술항아리를 발견했다. 재수 없게 걸린 것이다. 노인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은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려 후에 확인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다가 진짜로 재가승 마을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몸집이 크고 대체로 온순했다. 주식은 귀리와 메밀이고 의복은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어야 할 만큼 가난했다. 마을 집들 중에 잘살 듯한 기와집에 들어갔다. 노인장은 조와 귀리, 그리고 감자가 섞인 밥과 소금물 국, 그리고 소금 뿌린 생 무를 저녁식사로 대접했다. 김재준은 한술 떴지만 온통 모래여서 씹을 수가 없었다. 결국 비상시 먹을 농마가루를 먹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팔자가 좋은 집이라는데 김재준은 혹시나 하여 ‘쌀밥은 몇 번이나 잡수냐’고 물었다. 노인장은 ‘일 년에 두어 번 먹는 자기가 상팔자’라며 대답했다. 가난한 그들은 자기들이 여진족인 줄도 모르고 재가승이라는 말도 남이 하는 소리로 안다. 김재준은 ‘그들도 한국 사람이고 자연에 유폐된 동족 이란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다.

김재준은 이곳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당시의 술문화와 성문화를 경험하였다. 직속상관들이 공창가에 갈 때 김재준을 꼭 데려갔다. 김재준은 ‘아니오’라고 말 못하고 따라나섰다. 술자리를 같이하다가 잠자리가 시작 될 무렵이면 성(sex)적 호기심이 많았지만 동정을 지키고자 뛰쳐나갔다.

“어쨌든 결혼 때까지 나는 숫총각이었다.”15)

[각주]

[15] “장가가던 이야기”, 『전집』, 제13권, 34.